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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 짓밟힌 공간, 형제복지원 강제수용소의 실체

맛난집29 2025. 8. 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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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배경 – 도시정화와 부랑자 단속 정책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에 걸쳐 한국 사회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던 시기였다. 당시 정부는 경제 성장을 국가적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도시의 이미지를 ‘근대화된 국가’의 상징으로 내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급속한 변화 속에서 사회적 약자, 즉 노숙인·고아·장애인·일용직 노동자 등은 제도적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다. 정부는 이들을 ‘도시 미관을 해치고 치안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규정하면서, 도시정화 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을 시행했다.

 

이 단속은 복지적 지원이나 사회 안전망 구축과는 거리가 멀었다. 경찰과 행정기관은 실적을 쌓기 위해 무차별적인 검거를 자행했으며, 신분증이 없거나 단순히 옷차림이 초라하다는 이유만으로도 단속 대상이 되었다. 길에서 집을 나선 학생, 공장에서 퇴근하던 노동자, 심지어 여행객조차 ‘부랑자’로 몰려 끌려가기도 했다. 즉, ‘부랑자’라는 개념은 매우 모호하고 자의적이었으며, 사실상 행정 편의와 사회적 통제를 위한 도구로 기능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뿐 아니라 정상적인 시민들까지 강제적으로 수용시설로 보내졌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부산에 위치한 형제복지원이었다. 형제복지원은 겉으로는 ‘부랑인 선도 시설’ 혹은 ‘재활 보호소’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실제 운영 방식은 강제수용소와 다르지 않았다. 1975년 문을 연 이 시설은 최대 3,000명 이상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거대했으며, 높은 담장과 철저한 통제로 외부와 차단된 상태로 운영되었다. 무단으로 이탈하려는 사람은 즉시 폭력으로 제압되었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사실상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 채 존재해야 했다. 경찰과 행정기관은 형제복지원에 사람들을 끊임없이 공급하며 ‘부랑자 정리 실적’을 쌓았고, 그 결과 이 시설은 짧은 기간 안에 수천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형제복지원의 존재는 당시 국가 정책의 구조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정부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거나 자립을 도울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보다는, 그들을 ‘사회에서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을 우선시했다. 겉으로는 복지적 언어를 사용했으나 실제로는 사회적 문제를 가시적으로 제거하고 도시 이미지를 관리하려는 목적이 본질이었다. 다시 말해, 형제복지원은 한국 사회가 약자를 어떻게 배제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자, 국가가 제도적 폭력을 행사한 구체적 현장이었다.

 

더 나아가, 이 시기의 사회 분위기는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적 통치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당시 군부정권은 사회적 안정을 구실로 개인의 자유를 쉽게 억압했으며, 형제복지원 역시 이러한 통치 논리 속에서 정당화되었다. ‘거리의 부랑자를 없애 깨끗한 도시를 만든다’는 구호는 실제로는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는 장치였고, 이는 사회 전반에서 ‘약자에 대한 폭력적 낙인’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형제복지원은 단순히 하나의 복지시설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 인권을 경시한 시대적 산물이었다.

인권이 짓밟힌 공간, 형제복지원 강제수용소의 실체인권이 짓밟힌 공간, 형제복지원 강제수용소의 실체
인권이 짓밟힌 공간, 형제복지원 강제수용소의 실체

 

 

수용소 내부의 현실 – 폭력, 강제노동, 죽음

형제복지원의 문턱을 넘어선 순간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자유로운 개인이 아니었다. 하루 일과는 새벽부터 시작되었으며, 수용자들은 군대식 집합 구호와 구타로 기상을 강요당했다. 이후에는 농장, 공장, 건설 현장 등 외부 노동에 강제로 동원되었는데, 노동 강도는 극심했고 보수는 전혀 지급되지 않았다. 사실상 무임금 노예노동이었으며, 시설 운영자는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일과 중 조금이라도 지시를 어기거나 속도가 늦으면 즉시 관리자의 구타가 이어졌다. 곤봉, 쇠파이프, 주먹, 발길질은 일상적 통제 수단이었으며, 때로는 ‘본보기’를 위해 한 사람을 공개적으로 심하게 구타해 다른 이들이 두려움 속에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폭력은 단순한 통제 수준을 넘어 생명을 위협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는 수백 명에 이르며, 피해자와 연구자들은 은폐된 사례까지 포함하면 수천 명에 달할 수 있다고 증언한다. 사망자의 시신은 가족에게 알리지 않은 채 몰래 암매장하거나 화장 처리되었고, 시설은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피해자 가족들은 사랑하는 이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

 

어린아이와 여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빼앗긴 채 노동에 내몰렸고, 제대로 된 성장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여성들은 성폭력의 표적이 되었으며, 이를 폭로하거나 거부할 방법조차 없었다. 일부 피해자는 “관리자의 방으로 불려가면 다시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증언했다. 그 안에서 벌어진 학대는 단순한 개인적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 범죄였다.

 

형제복지원은 겉으로는 ‘재활’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인권 유린을 일상화한 강제수용소였다. 수용자들은 언제 풀려날지 기약조차 없는 상황에서 매일 살아남기 위해 버텨야 했고, 그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철저히 무너졌다. 한 피해자는 훗날 인터뷰에서 “감옥은 죄가 있으면 형기를 마치고 나오지만, 형제복지원은 죄도 없는데 언제 나올지 알 수 없는 지옥이었다”고 말했다. 이 증언은 형제복지원이 단순한 복지시설이 아니라 인간성을 철저히 파괴하는 수용소였음을 보여준다.

 

 

 

 

 

 

국가의 책임과 사회의 침묵

형제복지원 사건은 단순히 한 시설장의 탐욕이나 범죄로 환원할 수 없다. 그것은 국가와 사회의 구조적 묵인 속에서 가능했던 범죄였다. 당시 정부는 ‘부랑인 단속’을 실적으로 환산했고, 경찰과 공무원은 성과를 내기 위해 무고한 시민들까지 연행했다. 국가가 요구한 ‘거리 정화’라는 구호가 곧 인권 침해의 정당화 논리로 작동한 것이다. 행정기관은 시설의 운영 실태를 제대로 감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설의 활동을 묵인하고 지원했다.

 

언론 역시 침묵했다. 당시 보도는 형제복지원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모범 시설’이라는 식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역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민들은 “문제 인물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표면적 효과만 보고 안도했으며, 시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외면했다. 이렇듯 국가와 사회 전체가 침묵하거나 묵인했기 때문에 형제복지원은 12년 동안 수천 명을 수용하고 수많은 인권 유린을 저지를 수 있었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의 흐름 속에서야 비로소 사건은 세상에 드러났다. 한 검사가 내부 고발을 통해 형제복지원의 실태를 밝혔고,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지면서 사회적 파장이 커졌다. 그러나 당시 군부정권은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했다. 결국 시설장은 횡령 등 일부 혐의로만 처벌받았고, 정작 핵심인 인권 침해와 집단 학살 문제는 법정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국가가 어떻게 약자를 낙인찍고, 제도적 폭력을 통해 사회에서 제거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더 나아가 사회 구성원 다수가 침묵했을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지도 증명한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결국 국가의 책임 방기와 사회적 무관심이 결합한 결과였다.

인권이 짓밟힌 공간, 형제복지원 강제수용소의 실체인권이 짓밟힌 공간, 형제복지원 강제수용소의 실체
인권이 짓밟힌 공간, 형제복지원 강제수용소의 실체

 

 

피해 생존자의 증언과 고통의 연속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은 시설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평생에 걸쳐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그들이 겪은 폭행과 강제노동, 성폭력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많은 피해자들이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웠으며, 일부는 심각한 신체적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사회적 낙인이었다. 형제복지원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곧바로 ‘부랑자 출신’이라는 편견이 따라붙었다. 피해자들은 취업이나 결혼 등 삶의 여러 영역에서 차별을 겪었고, 결국 스스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어 증언을 시작했다. 그들의 증언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핵심 근거가 되었고,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생존자들의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국가의 공식 사과와 배상, 명예 회복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국회에서는 형제복지원 특별법 제정이 논의되었고, 일부는 통과되기도 했으나 여전히 미비하다. 피해자들은 매번 과거를 떠올리며 증언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진실을 알리고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싸우고 있다.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의 존재는 이 사건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임을 보여준다. 그들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한, 형제복지원은 끝난 사건이 아니다.

 

 

 

 

 

 

오늘날의 의미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교훈

형제복지원 사건은 단순히 과거의 비극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국가 권력이 약자를 어떻게 억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이며, 사회가 침묵할 때 어떤 비극이 반복되는지를 증명하는 사례다.

 

민주화 이후에도 유사한 문제는 계속 발생하고 있다. 아동보호시설, 장애인 거주시설, 요양병원 등에서 학대 사건이 꾸준히 보도되고 있다. 이는 제도가 변했어도 사회적 약자를 통제와 수용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기억하고 교육하는 일은 단순한 과거 추모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인권을 지키는 실천이다.

 

국가 차원에서는 반드시 철저한 진상 규명과 공식 사과, 피해자 배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피해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재발 방지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된다. 시민 사회 역시 약자를 사회적 부담이 아닌 존엄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감시와 참여, 연대 속에서만 유지된다. 형제복지원은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권의 교훈이다. 인권은 선언이 아니라 끊임없는 실천이며, 그 실천이 무너질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를 형제복지원은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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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 짓밟힌 공간, 형제복지원 강제수용소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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